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문단 편집) === [[우상화]] === [[파일:external/1stdream.com/06fb877caf2f46c701d03dd2d5117bd0.jpg]] 그의 그 유명한 [[황금]] 동상. 대통령궁의 한복판에서 [[태양]] 쪽을 바라보며 회전한다. 니야조프 재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의 공식 입장은 동상이 태양을 향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니야조프를 존경하는 태양이 동상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이 동상 건립에 1,200만 달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http://bobsaway.files.wordpress.com/2011/07/95518-050-4c3aefe7.jpg?w=684&h=1024|# 실제 높이]] [[https://i0.wp.com/www.archivoshistoria.com/wp-content/uploads/2020/07/Niyazov-2.jpg|# 확대된 모습]] [[http://pds12.egloos.com/pds/200906/24/60/a0118060_4a41968124e30.jpg|# 다른 사진]][* 그리고 이는 게임 [[트로피코 시리즈]]에서 쓸데없이 훌륭하게 구현되었다.] [[파일:external/newsimg.bbc.co.uk/_42376055_statue203ap.jpg]] 그 동상도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당시 수도에는 50m마다 하나씩 니야조프의 초상화나 동상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니야조프 시기 투르크메니스탄에는 14,000개의 동상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http://cafefiles.naver.net/data26/2007/8/31/45/npea_xjfdjeh.jpg|#]] [[http://cafefiles.naver.net/data26/2007/8/31/217/npee_xjfdjeh.jpg|#]] 그러면서도 니야조프는 "나는 거리에 있는 (나의) 사진과 동상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논외급인 [[백두혈통|김씨 3대]]과 국가 모토[* '마시아스 응게마 외의 신은 없다(No hay otro Dios que Macías Nguema)'. 진짜 이것이 1978~1979년 [[적도 기니]]의 '''공식''' 국가 모토였다.(...)]에까지 우상화 구호를 넣은 [[마시아스 응게마]] 정도를 제외하면 니야조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우상화에 집착한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그 수준은 영어 위키피디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항목에서 대놓고 '[[북한]]의 [[김씨 왕조]]와 유사하다'고 기술될 정도였다. 우선 니야조프는 자신을 드높이기 위해 위의 황금 동상을 비롯한 여러 동상들을 세웠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독재자]]들과 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나라에선 상당한 막장짓인데, 이슬람권에서 동상을 비롯한 [[우상숭배]]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인형조차 우상숭배네 뭐네 하며 논쟁이 벌어진다. 그러니 '''사람 동상'''이 문제시되지 않을 리가 없다.] 우상숭배를 금기시하는 나라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데에서 그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립 이후에 [[서기장]] 시절의 자신을 기리기 위해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의 [[카스피 해]]에 맞닿은 항구도시 크라스노보츠크(Красноводск)를 [[튀르크멘바시]](Türkmenbaşy)로 개칭했으며, 모든 국민들에게 자신의 초상화가 새겨진 시계를 선물한 것도 모자라 자기 부모 생일을 각자 국경일로 정했다. 자신의 아버지 생일은 아버지의 날, 어머니 생일은 어머니의 날 국경일로 정하는 식. 거기다가 니야조프는 어머니의 동상도 전국 곳곳에 세웠으며, [[카라쿰 사막]] 한가운데에도 니야조프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4년에 니야조프의 고향에는 니야조프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모스크가 있는 복합 단지가 1억 달러를 들여 세워졌다. [[2002년]] 8월 10일에 니야조프는 '러시아어에서 유래한 달 이름과 요일 이름을 개명해야 한다'며 달과 요일 이름을 투르크메니스탄 식으로 변경했다. 그나마 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적 위인들 이름을 달 이름으로 삼고 요일 이름을 페르시아식으로 바꾼 것은 그렇다 쳐도, 니야조프는 2월은 국기 이름인 바이다크(Baydak)로 바꾸고 4월은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 '구르반솔탄(Gurbansoltan)'으로 개명한 것도 모자라, 1월은 아예 '튀르크멘바시'로 호칭을 바꿨고, 심지어 9월은 아예 본인이 집필한 경전인 '루흐나마'로 이름을 바꿨는데, 루흐나마를 완성한 날짜가 2001년 '''9월''' 19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역법은 그가 사망한 이후인 [[2008년]] 7월이 돼서야 폐지되었다. 번외로 [[2003년]]은 '구르반솔탄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또 2002년 2월 18일에는 자신의 62번째 생일 기념 행사 때 62세에 죽은 [[무함마드]]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파르무라트 또한 무슬림이었다.]는 명목으로, 모든 국민은 62세가 되는 날 정부수당과 함께 3일 간의 휴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생을 12년 주기로 나눈 '니야조프 분류법'에 의하면 노년층은 85세에서 시작하며 73세는 '지혜의 나이', 61세는 '영감의 나이'다. 니야조프는 자신이 쓴 시에서 자신을 '''투르크멘의 정신이며 황금시대를 가져온 구세주'''로 자신을 묘사했으며, 심지어 아예 '''자신의 탄생에 관련된 신화까지도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은 매일 아침 수업 전에 "만약 내가 위대한 사파르무라트 튀르크멘바시를 배신한다면 내 심장이 멎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해야만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urkmenistan_007.jpg]] 여느 독재자들이 그랬듯 [[지폐]]에 초상화를 넣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까지 만들어 유제품과 술, 옷, 양탄자 등을 판매했다고 한다. 그가 집권하던 당시 [[독립, 중립,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가|투르크메니스탄의 국가]] 첫 소절은 "Türkmenbaşyň guran beýik binasy", 그러니까 "튀르크멘바시가 세운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가사[* 니야조프가 직접 쓴 가사다.]로 시작되어 노래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이 나오는 가사였다.[* 하다 못해 [[북한]]의 국가는 물론이고 [[김일성]], [[김정일]] 장군의 노래나 [[문화대혁명]] 시기 [[동방홍]]마저 시작되자마자 독재자 찬양 구절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애국가(북한)|북한의 국가]]만큼은 '''김일성 우상화가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이던''' [[1947년]]에 만들어졌기에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이 부분은 '''후렴'''인데도 '''1절보다 먼저 부르도록 했다.'''[* 절보다 후렴이 먼저 나오는 국가는 남아메리카 스페인어권 나라들 중에 많다.] 물론 이 부분은 니야조프의 사후인 [[2008년]]에 우상화의 의도가 담긴 부분을 교체하고 '후렴-1절' 순서를 '1절-후렴' 순서로 변경했다. 국영 [[텔레비전]]에서 시시때때로 니야조프의 얼굴이 엄청나게 자주 비춰졌던 건 기본이었으며, 텔레비전과 언론에서 대통령의 이미지는 항상 선명하게 보여야 했고, 더구나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의 모든 여객기 기내에는 니야조프의 사진이 걸려 있었던 데다가[* 하다못해 '''그 [[북한]]도''' [[고려항공]] 기내에까지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을 걸어놓지는 않았다. 기내에 대통령 사건 걸기는 니야조프의 후임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심지어 한 [[한국인]] 여행자의 증언에 따르면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화장실]]에까지 니야조프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경악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니야조프는 공인 [[시인(문학)|시인]]이라 시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면 국영 텔레비전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매일같이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아시가바트의 한 고등학교 수학 교사는 "대통령의 말(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니야조프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답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 인증을 거절당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히도 니야조프는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니야조프는 유대계 러시아인인 무자 니야조바(Muza Niyazova, 1938~)을 만나 아들 무라드(Murad, 1967~)와 딸 이리나(Irina, 1969~)를 낳았다.[* 특이하게도 아들 이름은 이슬람식으로 아랍어 무라드로 지었지만, 딸 이름은 정교회식 러시아어 이름인 이리나로 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